첫째, 전쟁 문제이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국민들과 병사들은 이미 전쟁에 지쳐 있었다. 특히, 농촌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한 병사들은 스스로 싸우기를 포기하고 병영을 이탈해 대규모로 귀환하고 있었다. 레닌은 이것을 보고 "병사들은 자기들의 발로써 평화 쪽에 투표했다."고 썼다. 그러나 임정의 수뇌들은 전쟁의 수행을 원했다. 우선, 입헌민주주의 사상을 가졌던 그들은, 특히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연대 의식을 강하게 느꼈으며, 이 의식은 신력(新歷)으로 1917년 4월 2일에 단행된 미국의 참전으로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미국의 임정 승인과 이에 따른 32,500만 달러의 차관 공여는 임정의 속전 결의를 강화시켰다. 임정의 지도자들은 또 러시아가 다른 나라들과의 공약을 준수해야 한다는 국가로서의 의무감을 강조했으며, 승전을 통해 흑해를 러시아의 지배 아래 두려고 했고, 군을 계속 전쟁에 개입시킴으로써 소비에트와 결별시키려고 했다.
둘째, 토지 문제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평화를 열망했듯이, 거의 모든 농민은 토지의 즉각적인 무상재분배를 열망했다. 임정 일부에서도 처음에는 이 열망에 호응하는 정책을 취하려는 구상이 나왔다. 그러나 임정의 중심 인물들은 스스로 토지를 소유한 중산 계급의 대변자로 인식했고, 따라서 토지 개혁을 과감히 수행하지 못했다. 물론 차르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노동자들보다 더 과격해진 농민들은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지주나 중산층의 토지를 점령해서 분배했다. 따라서, 뒷날 볼셰비키가 자신들이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볼셰비키가 집권했을 때는 농민들이 스스로 이미 토지를 차지해 정부가 나누어 줄 땅이 없었다.
그러면 임정은 왜 상황을 이렇게 잘못 판단했는가? 우선, 임정 요인들과 임정을 지지한 부르주아지들은 2월 혁명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해서라도 일단 그들이 쟁취한 것들을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상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하겠다는 결의가 컸다. 농민들도 마찬가지였을 뿐만 아니라, 과격도(過激度)에 있어서 오히려 노동자들을 능가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차르 체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것은 자기들이며, 앞으로 몇십 년동안 그 권력이 유지될 것으로 믿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사례에서 보듯이, 혁명에는 주기가 있어서 과격파의 장악에서 보수파로의 반동이, 쉽게 말해 '러시아판 테르미도르(Thermidor)'가 올 것임을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권력 기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정 개혁을 뒤로 미루고 대독전(對獨戰)을 수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해, 스스로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그리하여 평화와 개혁을 약속한 소비에트에게, 특히 볼셰비키에게, 집권의 길을 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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