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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타이완과 한국, 운명의 관계사
작성자 유정현 등록일 2021-08-07 조회수 131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하였고, 중일전쟁에서도 중국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쟁 후 공산당은 이미 조직력과 군사력이 월등해졌고, 위기를 느낀 국민당과 장제스 정권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않아 중국공산당과의 전쟁을 맞이했다. (제2차 국공내전, 1946~1950) 대륙의 주인 자리를 놓고 벌인 일련의 내전에서 부패하고 민심을 잃은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은 공산당과 홍군에 패배하였고, 난징이 함락당하고 결국 장제스와 국민당은 베이징의 수 많은 유물들을 모두 가지고 대만으로 탈출하게 된다. (국부천대, 1949) 그렇게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중국은 공산화되었다. 일본에 지배를 받았던 타이완인들은 이제 대륙에서 온 사람들의 강압적인 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일전쟁이 종전되기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김구, 김규식 등 수 많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젖줄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국부천대 이후에도 한국과 중국국민당의 인연은 계속되었고 신생국 대한민국의 첫 수교국은 장제스의 정부가 되었다. 미국를 비롯한 서방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국과 대만은 혈맹이자 우방국이었다.

장제스의 독재가 강화된 대만은 6.25 전쟁 당시 한국을 돕기위해 국부군 투입을 시도하였을 정도이며 박정희 정부 하에서도 양국은 친미 반공 진영 동맹국으로서 우호 관계를 강화해나갔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냉전이 완화되는 데탕트 시기로 접어들었고,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써 유엔 상임이사국이었던 타이완은 중국의 국제사회 등장과 미국의 이에 대한 용인으로 그 자리를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주었고 유엔 회원국에서 추방되기까지 했다. 이 떄부터 타이완은 완전히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일국양제, 즉 중국이라는 한 국가 내의 체제로 대만을 간주하겠다는 중공의 결정에 따라 중공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대만과의 단교가 조건이었기 때문에 대만은 시간이 갈수록 수교국들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한국도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 한국 정부는 70년대부터 대만과 거리를 두고 중국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했다. 대만에게 있어서 한국은 반공 동맹이자 미국과 연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이웃 국가였다. 그러나 한국 역시 대세의 흐름에 못이겨 1992년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자동으로 대만과의 수교를 끊었으며, 명동의 타이완 대사관은 중국 대사관으로 바뀌었다. 당시 한국 내 화교들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90년대 이후 한국 화교는 대륙에서 건너온 신화교가 구화교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첫 수교국이자 한국 독립 기여의 최일선 국가였던 대만은 그렇게 한국에게도 외교적으로 버림받았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우호적이며 상호 간 민적 감정도 긍정적인 편인다.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도 한국과 대만은 물자 교류와 무역도 활발했으며 여행과 관광도 원활히 이루어졌다. 중국이 G2 자리에 오르고 홍콩을 넘어 대만에까지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현재에 있어서 대만과 한국 간 관계의 미래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출처 :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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